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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진 시간이 되었으므로 > 퍼포먼스

퍼포먼스(가변설치)_녹음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변환된 오라토리오_2023

2023.09.02

개인전

2023《 정해진 시간이 되었으므로 》, 구석으로부터(구 정동교회), 대전 / 2023 차세대artistar지원사업 2년차, 대전문화재단 지원

작가 · 기획

김채원

음악 감독 · 편곡
전지민

영상 감독

이정주

평론

김병수

오라토리오 Oratorio

Aria Solo
송화목

Soprano
박예빈 
박희수

양명지
조은선

Alto
박지오

백하은
이도희
이혜람

Tenor
고종찬

윤중
이성현

Bass

이동근
이영훈
채두환
황희준

Violin 1
강민정

Violin 2
정태은

 

Viola
양희찬

Violoncello
이재아

평론

피진과 잔향의 소리들

김채원 작업의 층위는 복수적인데 다양한 버전을 구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선 사운드 아트라는 측면을 살펴본다. 2020년 《집단데이터의 변환》과 같은 해 《집단데이터의 변환 : 3'》 그리고 2022년 《목소리에서 목소리로》에 이르기까지 사운드 아트와 인스톨레이션 그리고 퍼포먼스를 아우른다. 이번 2023년 대전 ‘구석으로부터’(이 전시장이 원래 교회였다는 점은 아주 의미심장하다.)에서 가진 《정해진 시간이 되었으므로》는 그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각 예술과 음향(sonic) 예술을 연결하고 융합하는 현대 사운드 아트는 20세기 초반 등장하여 번성하고 다양한 분야로 성장하였다. 1980년대부터 ‘사운드 아트’라는 낱말을 사용했지만 그 개념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어렵다. 사운드 아트는 소리의 이념부터 물리적 경험과 활동까지 이르는 모든 예술 작업이다. “매체와 주체 양자로 소리를 이용한 소리에 관한 예술 (Art about sound, using sound both as its medium and as its subject)”이라고 테이트 모던은 정의한다. 소리, 즉 음향과 음악의 관계는 무엇일까? 굳이 음악이 있는데 사운드 아트라는 낱말을 만들어 쓸 필요가 있을까? 왜 사람들은 이 어휘를 계속 사용할까? 음악은 사운드이지만 모든 음악이 사운드 아트는 아니다. 음악은 시간 예술이다. 시간에 맞춰 소리를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음악은 고유한 문화적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 반면 사운드 아트는 상황이 중요하다. 사운드 아트에 음악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전통적인 음악 감상 상황과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사운드 아트는 예술 세계에 존재하며 음악을 포함할 수 있다. 그리고 비음악적 사운드도 포함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술 작품으로 제시된다. 음악이 시간에 따라 소리를 정리하는 것이라면 사운드 아트는 공간에 소리를 정리하는 것이다.(이 사항은 김채원의 작업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사운드 아트의 공간적 측면을 ‘오디오 지리학’이라고 한다면 음악에서 배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진 것들이 새롭게 고려될 수 있다. 사회적 관계, 신체의 내/외부 그리고 실제와 가상 공간 등등.(이에 대한 확장 혹은 증명이 2022년 아트센터나비(타작마당)에 이어서 벌어지는 2023년 이응노 미술관 김채원의 전시인데 별도로 문서화해야 한다.) 그것들을 구분하는 소리의 속성을 인정할 수 있다. 사운드 아트의 세계에서 공간은 일반적으로 설계된 사운드 생성 장치의 속성을 나타낸다. 공간은 사운드 아트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음파의 물리적 특성과 소리 인식의 심리적 측면을 탐색할 때 주어진 환경의 특성은 아주 중요하다.(그래서 설치미술과 행위예술을 김채원은 사운드 아트에 접속시킨다.)

소리를 생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질과 기술은 다양하다. 그 메커니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사운드 아트 작품은 해독하기에 너무 당혹스럽다. 이때 1) 예술가의 의도, 2) 공간의 영향, 3) 물질과 기술, 4) 주제, 5) 형식 등은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물음이다. 그런데 사운드와 아트가 말 그대로 하나로 스며들 수 있을까? 《음악의 정오표》는 1913년 마르셀 뒤샹이 만들었으나 그의 생전에는 실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운드 아트의 첫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2020년대 김채원의 사운드 아트는 물질로서 소리와 문화적인 성질, 즉 언어성과 여운을 매개한다. 분위기와 정서는 정동처럼 정치적이지는 않지만 색다른 미학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외국어로서 서양 음악이 토착화되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종교와 문학 그리고 형이상학이 겹쳐서 들어온다. 그 수용의 방식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피진(pidgin)은 어떤 언어의, 특히 영어·포르투갈어·네덜란드어의, 제한된 어휘들이 토착 언어 어휘들과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순한 형태의 혼성어를 뜻하는데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의사소통할 필요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보통 음악은 서양 음악, 즉 클래식 뮤직을 줄여 부르는 클래식을 의미한다. 특히 교회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여기에서 벗어난 세속적인 음악들은 이제 다양한 언어처럼 쓰인다. 김채원이 처음 획득한 음원은 음악이 아니었다. 그런데 가공을 통해 음악 작품처럼 되었다. 그 소리는 마치 물질처럼 변용되어 새로운 사건을 낳는다. 굳이 말해주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면 확실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물론 어떤 분위기는 감잡을 수도 있지만! 어떤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제국의 힘이 작용하는 방식에 현장 혹은 현실과의 융합 속에서 인공적인 생성을 보게 된다. 이 경험은 전통적인 방식의 음악과는 다른 미학적 체험을 하게 한다.

현실에 개입하는 활동가로서 예술가 실무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김채원은 펼친다. 작업 방법으로서의 피진화(혼잡어화)를 채택한다는 뜻이다. 음악 언어와 그 실천의 장난/유희/연주에서 작가는 피진어를 제국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제시하고, 사운드 아트(그리고 세계)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의도적인, 따라서 인공적인 피진화를 제안한다. 그 속에서 만남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다. 분명한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지식을 제시하기 보다는 어떤 복수성을 통해 애매성을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음악, 종교, 언어, 시적/소설적 사고, 글쓰기 그리고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를 능숙하게 복합적으로 전개하는 김채원은 활동가/예술가 실무와 그 이상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음악이 아닌 것을 유사 음악으로 만들어 현실에 대한 미적 체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잔향 속의 현실과 현실의 잔향. 이 지점에서 김채원 작업을 우리는 두 귀로  각각의 소리를 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들으려 하고 있는 것은 귀의 체제를 변경하는 일로서 처음으로 들려오는 잔향이다. 그 잔향에서 처음으로 “제국적인 것”은 소수자를 위한 마이너리티의 사운드 아트로 변모하는 것이다. 잔향(殘響)은 소리를 일으킨 물체가 진동을 그친 뒤에도 주변 사물에 반향된 소리가 남아서 계속 들리는 현상을 말한다. 김채원 작업의 맥락에서 잔향은 현장에 울려 퍼졌던 분쟁 혹은 억압의 소리가 그 진동이 그친 후에도 그 곳의 장소(성), 공기, 건물 그리고 사람들 마음 속에 남아 계속 울리고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가는 묻는다. 그 소리의 근원을! 이제 소리는 어떤 뿌리, 충돌에서 시작되었지만 다른 차원에 이른다. 거기를 실존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다른 현장이다. 단순한 타임 리프가 아니라 시간의 공존이다. 무언가를 생산하지만 그냥 낳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통스럽기도 한 시간을 감당하는 방식이 듣는 것이다. 청취는 능력이면서 이해인데 생물학적 감각이고 또 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들으면서 알 수는 없다. 잔향은 반성이면서 성찰일 수 있다.

다시 돌아본다! 거울의 이미지는 회화의 미메시스를 떠오르게 한다. 미학에서 재현은 단순히 똑같이 그린다가 아니라 현실을 감당한다는 의미이다. 과연 어떤 것이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치, 경제, 예술을 다르게 말하면 권력, 돈, 그리고 물음표로 남는 세계이다. 여기에 거의 무표정하게 문화적으로 등장하는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까? 사적인 체험을 동시대적 경험으로 감당한다. 이게 김채원의 작업이다. 잔향의 제작술로서 사운드 아트는 새로운 듣기를 요청한다. “‘듣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듣기’를 본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확실한 ‘사건’이다.”(와시다 키요카즈) ‘정한 시간이 되었으므로’ 무엇인가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러나 거기서 들리는 소리를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수용한다. 잔향과 원음 그리고 그 거리의 차이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세기의 정도, 그 미적 효과 또한 측정 불가에 가깝다. 이 일련의 사태를 사운드 아트 예술성이 감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로서 세계와 예술 작품의 세계가 소리에서 서로 스며드는 장소가 김채원이 만든 피진과 잔향의 소리들이다.

글/김병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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